Descriptions of Housewives and Housemaids in Hong Kong Fiction after 1997

 

 


KIM Hyejoon  KHJ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research how women - especially housewives and housemaids - are described in relation to domestic/caring labor in Hong Kong fictions after 1997, and to estimate in which state the Hong Kong fictions are located on this matter regarding the gender equality problem.

Although there has been improvement to the domestic gender equality in Hong Kong, it still is mostly the housewives who take full responsibility on domestic labor. The image of women as those dedicated to domestic labor is still being repetitively reproduced in Hong Kong fictions too. Moreover housewives are often narrated as unreasonable, irrational, unproductive beings, those who have no other choices but to do house chores and depend on their husbands. Furthermore, to housemaids (‘菲傭’) as social agent of domestic labor, the injustice of reification on women is done in the fiction as well as in the real world. Even the relationship of controlling and being controlled is built between housewives and housemaids of the same gender.

Hong Kong fictions do not yet give enough attention to the significance of domestic/caring labor, which women still are entirely responsible to, on the issue of gender equality. Nonetheless, it is clear that Hong Kong fictions are showing the possibility of improvement on this matter.


[Key Words]

Hong Kong, Hong Kong fiction, housewife(homemaker), housemaid, domestic labor, caring labor

 

 

KIM Hyejoon, "Descriptions of Housewives and Housemaids in Hong Kong Fiction after 1997"(In Korean), Chinese Studies 33, (Pusan: Korean Association for Chinese Studies, Aug. 2009), pp.355-378.

 


 

1997년 후 홍콩소설에 나타난 주부와 가정부의 모습

가사노동 / 돌봄노동과 여성 문제를 중심으로

 

 

김  혜  준 KHJ

 

<목   차>

 

 

 

1. 머리말

2. 주부 - 가사노동/돌봄노동의 전담자

3. 가정부 - 가사노동/돌봄노동의 대행자

4. 맺음말



1. 머리말


소설에 담겨있는 온갖 이야기와 이미지 그리고 서술들이 사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소설의 창작과 유통 및 수용의 전 과정에는 문학행위의 참여자들이 가지고 있는 직간접적인 또는 의식적 무의식적인 의도가 관통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소설을 창작하는 작가는 물론이고 그것을 편집하고 출판하고 전파하는 출판 관련 중개자들 및 그러한 작품을 선택하고 읽어내는 독자들의 능동적 또는 수동적 참여가 작용한다. 소설은 사회 전체에 대하여 어떤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창출하거나 기존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거나 그것을 변형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의 모습이 홍콩소설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여성 문제에 관한 홍콩의 사회적 인식과 동향을 검토해보는 기회가 되는 것이자, 여성 문제에 대해 우리 자신이 가진 인식을 성찰해보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1997년 이후 홍콩소설에서 가사노동 및 돌봄노동과 관련하여 주부와 가정부의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여성 문제에 관해 홍콩소설이 어느 정도 의식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1) 이는 물론 여성을 특정한 사회적 역할이나 이미지로 고착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여성은 ‘목소리를 상실한 집단’이 되어버렸다고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몇 가지 이미지나 몇 가지 역할로 한정지을 수 없는 너무나 다원적이고 복합적인 인간 집단이다. 그런 면에서 잘게 분할된 공간을 계속 연결함으로써 그와 같은 공간이 끝없이 이어질 것이라는 상상을 불러일으키고, 이로써 유한한 공간으로 무한한 공간을 창조해내는 중국의 정원 예술과 같은 효과를 기대할 따름이다. 이 글이 토릴 모이가 비판하는 ‘여성 이미지 비평’과 유사한 곤혹에 처할 위험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방식을 취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2)

이 글을 위해 검토 대상으로 삼은 홍콩소설은 《香港短篇小說選》(香港三聯書店), 《사람을 찾습니다》(이젠미디어) 및 《香港文學》(香港文學出版社) 외 일부 홍콩의 콩의 간행물에 실린 1997년 후의 중단편 소설이다.3) 해당 출판물의 출간 시기、기간、연속성、판매 부수 및 영향력 등을 고려할 때, 이들 작품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이 시기 홍콩소설의 성과와 동향을 충분히 대표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2. 주부 - 가사노동/돌봄노동의 전담자


가정 내에서 일어나는 취사, 세탁, 청소, 육아, 교육, 노약자 돌봄 등 가사노동은 여성 그 중에서도 주부가 거의 전담하고 있으며, 그 노동량이 대단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통계청의 ‘2004년 생활시간조사’에 따르면, 성인남자의 평일 가사노동 시간은 31분에 불과한데 비해 성인여자의 하루 평균 가사노동 시간은 3시간 39분이며, 그 중에서도 주부의 가사노동 시간은 전업주부가 5시간 29분, 취업주부가 3시간 1분이라고 한다.4) 이와 같은 가사노동에 대해 오늘날에는 그것이 사회노동 못지않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인식이 조금씩 확산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왜 여성이 꼭 가사노동을 전담해야 하느냐는 의문에서 출발하여 남성도 가사노동을 공평하게 분담해야 한다는 주장도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과 주장이 일반화되어 여성의 가사노동이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되고 더 나아가서 남성이 가사노동을 공평하게 분담하기까지는 상당히 요원해 보인다. 통계청의 ‘2008년 사회조사’에 따르면, 15세 이상 인구 중 32.4%만 가사노동을 공평하게 분담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실제 상황은 이보다 더욱 열악하여 부부가 가사노동을 공평하게 분담한다고 응답한 경우는 남편 8.7%, 부인 9.0%에 불과했다고 한다.5)

한국과는 달리 홍콩에서는 남성이 취사를 포함해서 가사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것 역시 한국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일 가능성이 많다. ‘중국인 가정에서의 여성의 지위’라는 주제 하에 台灣, 天津, 上海, 香港 4개 지역 학자들이 공동으로 수행한 한 사회학적 연구의 결과는 이렇다. 홍콩 가정에서 가장 중시하는 것은 자녀 교육, 가정 지출, 남편의 직업 선택이다. 부부 각자의 직업 선택은 각자가 결정하고, 자녀의 결혼은 선 불간섭 후 관여하는 형태이다. 그 외 자녀 교육, 가정 지출 등 대부분의 가정 내 의사 결정은 서구의 영향을 받아 부부평등의 상황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유독 가사 부분에서 만큼은 여전히 중국의 ‘전통적인’ 역할 분담 방식을 따른다.6)

이를 말해주듯이 홍콩소설에도 가사노동은 그것과 관련한 묘사가 많건 적건 간에 절대적으로 여성 그 중에서도 주부가 거의 도맡아하고 있다. 〈魚咒〉(王良和, 2000)에서 주방일과 집안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은 어린 시절 화자의 어머니와 화자의 친구 어머니, 그리고 성장 후 화자의 아내 등 모두 주부이다. 〈當勞的官司和我的拳頭〉(顔純鈎, 2003)에서도 화자의 부인, 화자 친구의 부인 등 주부가 집안일을 맡고 있으며, 또 〈尋人啟事〉(黃靜, 2001)에서도 남편, 딸, 아들이 각기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역시 주부가 가사를 모두 떠맡고 있다. 이런 상황은 너무나 일반적이기 때문에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심지어 비현실적인 기묘한 이야기를 통해 현대적 대도시 사람의 소통이 단절된 삶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는 〈睡〉(韓麗珠, 2003)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은 수면병에 걸려 잠만 자면서 갈수록 신체가 줄어들다가 나중에는 그만 종적을 찾을 수 없게 되는 남자친구를 여자 주인공이 자기 집으로 데리고 와서 돌보는 이야기인데, 환자의 어머니는 아들을 돌볼 공간 문제로 남편과 다투기까지 할 정도로 고민을 하고, 이를 보다 못한 여자 주인공은 결국 그 남자 친구를 자기 집으로 데려와 보살피는가 하면, 이사 나갈 곳이 없어서 아버지와 아버지의 정부 그리고 어머니와 어머니의 애인이 함께 모여 사는 그녀의 집에서 조리를 하거나 그녀를 돕는 유일한 사람은 전업주부인 그녀의 어머니일 뿐만 아니라, 그 와중에 환자를 간호하러 오는 간호사(돌봄노동 대행자) 역시 당연한 일인 듯 여성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가사노동과 돌봄노동은 모두 여성의 몫인 것이다.

물론 이런 사정은 전업주부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취업주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與女朋友一起賣私煙的好日子〉(車正軒, 2003)에 나오는 화자의 어머니를 보자.


기본적으로 괜찮은 엄마다. 집안일을 잘 해서 와이셔츠를 카드처럼 매끈하게 다림질해놓는가 하면, 게으름도 피우지 않는데다가 출근해서 돈도 번다. 제일 형편없는 거라면 엄마는 돈이 없다는 것이다. […] 내친 김에 말하자면 엄마는 나와 아버지를 위해 옷을 다리느라고 땀을 뻘뻘 흘리는 것이었다. 엄마에게 에어컨을 틀까하고 물었더니 엄마는 필요 없다고 했다. (207쪽)


그녀는 ‘출근해서 돈도 버는’ 취업주부로서 홍콩의 그 무더운 여름에 절약을 위해 에어컨도 안틀고 땀을 뻘뻘 흘리며 아들과 남편을 위해 다리미질을 한다. 다시 말해서 그녀는 가사 일을 도맡아하면서 직장 일까지 하는 억척 여성인 셈인데, 말이 억척 여성이지 실제로 그녀가 감당해야 할 부담은 엄청난 것이다. 이처럼 취업주부들은 가사노동과 사회노동이라는 이중의 부담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또 이는 결혼한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我、阿蕎、牛蛙〉(粱錦輝, 2000)에서는 阿蕎와 李鐵가 동거할 집을 함께 대청소하기로 약속하지만 남성인 李鐵는 이런저런 일로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다가 阿蕎 혼자서 모든 일을 다 끝낸 후에야 나흘 만에 비로소 나타나며, 그 뒤로도 여성인 阿蕎가 전적으로 조리를 담당한다. 〈老鼠〉(文津, 1999)에서는 米妮가 남자 친구 米奇의 집을 대신 치우기도 하고, 쥐를 잡기 위해 살충제、쥐약、쥐덫 따위를 놓기도 하고, 심지어는 죽은 쥐의 시체까지 신문지에 싸서 갖다 버린다. 〈意粉、竹葉、小紋和其他〉(小榭, 2000)에서는 휴일이면 여자주인공 小紋이 남자 친구를 위해 시장을 보고 와서 점심과 저녁을 해먹이고, 〈反手琵琶〉(陳汗, 2000)에서는 과거 여자 친구가 마지막으로 다녀가면서 밥을 해먹었던 이후로 화자는 주방이라는 존재 자체를 잊어버리고 지냈다고 한다.

한국은 물론이고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었다고 알려져 있는 홍콩에서조차 가사노동에서 이런 상황을 보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달리 말하자면 홍콩소설에서 여성이 가사노동 전담자로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근본적으로 지역과 국가를 불문하고 가족을 보살피고 가사노동을 책임지는 사람은 여성이라는 모성 이데올로기 및 성별 분업 이데올로기와 남성의 가사노동 면제를 전제로 형성되어 있는 사회적 노동 시스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홍콩소설에서도 이런 면모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跳〉(綠騎士, 2000)에 등장하는 프랑스인 아론은 상류가정 출신으로 고급 교육을 받고 사회적으로 승승장구하다가 결국 격렬한 경쟁 속에서 스스로 파멸하여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마는데, 한창 때는 주말에도 집에 오지 못할 정도로 일에 파묻혀 지내는 그를 대신해서 그의 부인인 낭시가 요리, 육아, 손님 접대를 비롯해서 집안의 모든 대소사를 도맡는다. 한편 아론의 절친한 친구인 홍콩출신인 李坡는 평범한 소시민이지만 그 역시 사회적 경쟁 속에서 고투하고 있으며, 그의 부인은 남편보다 수입이 적은 직업을 가지고 가정 경제에 보조적 역할을 하다가 실직을 겪은 후에는 전보다도 더 적은 수입의 일을 다시 맡게 되는데, 그녀의 취업-실직-재취업 여부에 상관없이 어쨌든 가사노동은 모두 그녀의 몫이다. 결국 이 소설에서 작가는 무의식중에 남자는 사회노동에서 끊임없이 경쟁에 시달리는 존재로, 여성은 전업주부든 아니면 취업주부든 간에 가정에서 가사노동을 전담해야 하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當勞的官司和我的拳頭〉(顔純鈎, 2003)에서 慧心은 미성년자인 친딸 明君이 의붓아버지인 當勞에게 성폭행을 당한 사실을 알고 난 후, 자신이 야간 근무가 많은 간호사를 하느라고 딸과 가정을 돌보지 못해 일어난 일이라며 자책한다. 이 소설에서 취업주부인 慧心이 정작 천인공노할 죄를 저지른 재혼한 남편 當勞를 탓하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을 자책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남녀 성별 분업 이데올로기가 이미 실제적인 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삶에서까지 얼마나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가정 내에서의 노동은 가사노동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산업사회 이전에는 여성들이 가정 내에서 길쌈을 한다든가 농사를 짓는다든가 하는 비가사노동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런 까닭에 산업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고 난 후에도 특히 농촌에서는 혼인에 있어서 여성에 대한 주요 평가 기준은 다름 아닌 노동력과 생육 능력(노동력의 재생산 능력)이었다. 1970년대 중국 농촌을 배경으로 한 소설 〈又見椹子紅〉(黃燕萍, 1999)에서, 화자 어머니가 반 농담으로 麗菊가 예쁘다며 天叔婆의 며느릿감 운운하자, 天叔婆가 대뜸 “몸매도 가냘프고 엉덩이도 실하지 않으니”(151쪽) 자기 자식들이 눈에도 두지 않을 것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 麗菊 모녀가 麗菊의 생부로부터 쫓겨난 것도 같은 이치다. 표면적으로는 麗菊의 어머니가 아들을 낳은 후 곱사등이가 되면서 남편이 딴 여자를 보게 되었다는 것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녀가 밭일이나 돼지 키우기 따위에 대한 노동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평가 기준은 그 자체로 여성에 대한 잘못된 시각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렇지만 다소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과거에는 여성도 참여해야 했던 가내노동의 중요성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과거에는 가내노동에 투여되는 여성의 노동량이 많은 탓에, 비록 제한적이기는 해도 여성의 사회노동 참여가 가능했고, 또 이 때문에 남성의 가사노동 분담도 적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산업화가 진전되면서 여성의 사회노동 참여 기능은 점차 축소되고, 사회와 가정이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으로 갈수록 확연하게 구분되었으며, 이와 동시에 화폐 가치로 평가되는 임금 및 이와 유사한 형태의 소득을 얻지 못하는 일은 노동으로 간주되지 않게 되면서 가사노동이 보이지 않는 노동으로 고착되어버렸던 것이다.7) 가정기기의 발달과 소비재 상품의 확산으로 가사노동 자체의 양이 줄어들면서 여성의 사회노동 참여가 더욱 가능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 역시 전혀 그렇지 못했다. Ruth Cowan의 연구에 따르면,8) 그런 것들은 남성과 어린이의 가사노동 참여를 감소시켰을 뿐 여성의 가사노동 부담을 줄여주지는 못했고, 오히려 남성과 어린이를 사회노동이나 학습에 전념하도록 만들면서 여성의 가사노동 전담을 강화하고 고착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自由落體事件〉(顔純鉤, 2000)의 한 장면은 이런 결과를 그대로 보여준다.


그녀의 방을 들여다보니 개집처럼 난장판이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약간 겸연쩍은 듯이 말했다. “다른 사람이 자기 물건을 못 건드리게 해서요.” (265쪽)


짧은 구절이지만 가사노동이 전적으로 주부의 몫이 되었으며, 그것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는 경우 창피하게 느낄 정도로 의무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같은 소설에서 서른이 훨씬 넘은 나이의 남자 주인공이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아침이 되면 어머니가 그를 깨워줄 정도로 연로한 어머니가 집안의 모든 일을 다 떠맡고 있는 점도 마찬가지다. 결국 자본주의적 산업화 이후 성별 분업 이데올로기는 더욱 확고해졌을 뿐만 아니라 사회노동 시스템은 가사노동이 면제된 남성과 그를 뒷받침하는 가사노동 전담자로서의 여성을 전제로 하여 재정립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오늘날 남녀평등에 관한 인식이 점차 제고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가사노동 부분에서는 그다지 별다른 진전이 없는 것이다.

물론 홍콩소설에서 전적으로 예외 없이 가사노동을 여성이 전담하는 것만은 아니다. 〈魚咒〉(王良和, 2000)의 화자는 젖먹이 아들이 울자 얼른 자신이 우유를 타겠다며 선뜻 나선다. 〈螃蟹〉(王良和, 2002)의 화자와 화자의 아버지는 식구들을 위해 게를 조리해서 먹인다. 그러나 이런 행동들은 상시적이 아니었다. 소설 전체를 살펴보면 이런 것들은 특별한 상황이나 계기 또는 일시적 흥에 의한 단편적인 행동일 뿐이고, 가사노동은 역시 그들의 부인이 전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9) 이처럼 홍콩소설에서는 남성이 가사노동을 하는 예외적인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드물기도 하거니와 그마저도 일말의 보조적인 역할에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홍콩소설에서 주부 내지 여성을 가사노동 전담자로 묘사한다는 그 자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앞서의 언급에서도 다소간 짐작할 수 있듯이, 등장인물, 화자 및 작가의 행동과 시각에서 뚜렷이 드러나는바 기존의 관념을 답습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그것을 더욱 고착 강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當勞的官司和我的拳頭〉(顔純鈎, 2003)가 그렇다. 이 소설에서 화자는 의리 때문에 의붓딸을 성폭행한 친구의 재판을 도우러 나섰다가 낭패를 보는 인물이다. 이일이 벌어진 첫날, 화자가 몰래 직장까지 그만둔 것을 부인이 뒤늦게 알게 된 날, 그리고 그 후 마무리될 무렵에 보였던 부인의 반응에 대해 화자(작가)는 각각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날 귀가했을 때 若蘭은 냉랭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거실 가운데는 빗자루가 팽개쳐져 있었고, 주방에는 불기라곤 없었다. 세탁기 앞바닥에는 지저분한 옷가지가 한 무더기 쌓여 있었다. (226쪽)


두 딸도 난리판에 끼어들어 세 여자가 울었다가 욕했다가 했다. 若蘭은 식탁의 음식들을 바닥에 패대기치더니 주방에 뛰어 들어가 부엌칼을 목에 들이댔다. 두 딸이 울며불며 부엌칼을 빼앗았지만 若蘭의 손등이 칼에 상처를 입었고, 피가 손끝을 타고 식탁이니 의자니 방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230쪽)


반 년 여를 수입이 없어서 온 가족이 ‘씨나락’을 까먹고 있다 보니 若蘭도 나와 다툴 기력이 없어졌고 두 딸도 나를 투명인간 대하듯이 했다. […] 집에 돌아오니 若蘭은 말도 없이 갚아야 할 고지서 뭉치를 나의 면전에 내던졌다. […] 살아가려면 돈이 없어선 안 된다. 보아하니 이미 일을 찾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230-231쪽)


이상의 인용문에서 소설 속 인물이나 작가로 대표되는 홍콩 사람들이 주부의 가사노동 전담을 당연시하고 있음을 알기란 어렵지 않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보자면, 홍콩 사회에서 여성의 취업률이 얼마나 높든지 간에 기본적으로 그 노동 시스템은 남성의 가사노동 면제를 토대로 형성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남성이 사회적 노동을 여성이 가사노동을 전담한다는 성별 분업 이데올로기에 근거하여 구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문제는 그쯤에서 끝나는 것도 아니다. 이 소설에서 화자의 모든 행동은 시종일관 도의와 이치에 입각한 것으로 설명되는 반면에, 위 인용문에서도 어느 정도 드러나듯이 그의 부인 若蘭은 잔소리가 많고 무능하면서 무리하게 행동하는 사람으로 묘사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소설은 비록 작가가 의도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결국 주부란 비이성적、비합리적、비생산적이자 가사노동이나 하면서 남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라는 이미지를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10) 즉 이 소설은 여성으로서 주부에 대한 남성중심주의적 편견을 재생산해내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면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는 〈6座20樓E6880**(2)〉(陳麗娟, 2000)일 것이다. 이 소설은 직장에서 퇴근한 한 남자의 행적을 통해 현대적 대도시의 비인간적인 복제성과 반복성을 예리하면서도 해학적으로 풍자하고 있는 수작이다. 소설 속 남자는 퇴근길에 온통 똑같이 생긴 아파트촌에서 무심결에 남의 집에 잘못 찾아들어가 신문도 보고 저녁도 먹은 후 그 집의 주부와 잠자리까지 하려는 순간 실수를 알아채고 허겁지겁 그곳을 빠져나온다. 그리고 다시 자기 집으로 되찾아가서는 조금 전에 했던 행동을 또 그대로 되풀이한다. 다음은 이 소설의 한 장면이다.


누군가가 나와서 문을 열어주었다. 문이 미처 다 열리기도 전에 마누라는 뒤돌아서 요리 소리 지글거리는 주방으로 향했다. 손에 주걱을 든 채. 식탁에는 아이들 셋이 고개를 숙이고 한창 숙제를 하고 있었다. […] 그는 아이들을 흘깃 보고는 소파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손에 쥐고 있던 Z일보를 펼쳤다. TV에서는 와글와글 […] 마누라가 제일 좋아하는 드라마가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냄비에 뭐라도 집어넣었다하면 TV 앞으로 달려 나오고는 했다. […] 그는 침대 가에 걸터앉아 주방에서 들려오는 설거지 소리를 듣고 있었다. 얼마 후 마누라가 다 말린 빨래를 한 무더기 안고 들어서자 그가 내뱉었다. “어이, 빨리 안 해? 나 내일 조기 출근이란 말이야!” 마누라는 그를 등진 채 빨래를 하나씩 개기 시작하면서 말했다. “뭘 빨리해?” (113쪽)


여기서 보듯이 남편은 퇴근 후 신문이나 뒤적거리다가 부인이 차려준 식사를 한 뒤 침실로 가서 아직도 설거지와 빨래 손질 따위로 바쁜 부인에게 잠자리나 채근한다. 그 반면에 이 집 주부는(전업주부인지 취업주부인지 알 수는 없지만 취업주부라면 더 심각하다) 자신이 좋아하는 티비 연속극조차도 조리 도중에 잠깐잠깐 볼 수밖에 없을 만큼 끊임없이 가사노동에 시달린다. 그런데 여성작가가 창작한 이 소설의 전체 맥락을 따라가 보면, 주부란 그저 가정에서 요리를 하고, 아이를 돌보고, 티비 연속극에 열광하고, 세탁을 하고, 정해진 날에 남편과 잠자리를 같이 하는 일 따위를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인물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부란 매일 똑같은 가사노동을 반복하면서 남편에게 성적 서비스나 제공하고 티비 드라마와 같은 하찮은 일에나 매몰되어 버린 마비되고 사물화된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11)

이처럼 홍콩소설에서 가사노동과 관련된 주부의 모습은 여성에 대한 기존의 편견과 물화가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이 문제와 관련하여 여성의 모습을 다른 각도에서 제시하고자 노력한 작품이 전혀 없지는 않다는 점은 다소간 희망적이다. 〈玉傳〉(陳寶珍, 2002)이 그렇다. 이 소설의 주인공 玉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감정에 충실”(168쪽)하여 남자 친구가 끊이지 않았으며, 나중 건실한 남편과 귀여운 딸을 사랑하며 평범한 가정주부로 사는 중에도 순간적 충동이나 모호한갈구로 인해 종종 다른 남자와 욕정을 나누는 인물이다. 이 소설에는 다소 부자연스럽게 전개되기는 하지만 주인공의 그와 같은 삶의 이면에는 남성중심주의 사회 속에서 여성에게 들씌워진 허위적 관념과 억압적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으며, 여성에게 부가되는 가사노동 역시 그런 것 중의 한 가지였음을 산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다소 장황하지만 이 소설의 일부분을 요약해보자.


결혼 초기 玉는 취업주부로서 “낮에는 자신이 경영하는 미장원에서 온갖 일을 다 하면서 직접 미용사 일까지 했고, 밤에는 집에 돌아와 아무리 지쳤어도 먼지 하나 없이 집을 말끔하게 치웠다.”(164쪽) 그 후 남편이 深圳을 들락거리며 사업을 하자 그 뒷바라지를 위해 미장원 일을 그만 두고 전업주부가 되는데, 아이의 피아노교습소 동반을 포함해서 집안의 가사를 도맡는다. 남편이 자동차 사고로 다쳐서 집에 있는 동안에는 “매일 직접 주방에 들어가 偉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고, 세심하게 그의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갈아주었다.”(170쪽) 결혼 생활이 길어지면서 남편이 자신에 대한 애정 표시는 없고 아이에만 관심을 보이는 데 대해 그녀는 불평을 하기 시작하고, 남편은 그 속뜻도 모르고 여가 시간에 뭔가라도 배우든가 아니면 다시 미장원을 하라고 한다. 그러자 그녀는 “[친정] 엄마는 나이가 많아서 일(義務)을 많이 하지 못해요. 날마다 내가 밥 하고 애 공부하는 걸 지키다보니 혼이 빠진다니까요.”(171쪽)라고 대답한다. 그러는 와중에 딸의 피아노선생인 辛彥 “그와 내왕하게 되면서 그녀의 삶의 경관이 넓어졌다. 더 이상 집, 딸의 학교, 슈퍼마켓, 시장, 쇼핑센터 따위에 국한되지 않았다.”(175쪽) 그리고 어느 날 辛彥이 놓아둔 미용잡지를 보며 “옛날에는 꾸미는 걸 좋아했는데 지금은 집안일(家務)을 하느라고 숨 돌릴 틈이 없어요. 머리를 자르러 가기도 귀찮다니까요.”(176쪽)라고 말하게 되고, 급기야 헤어컷을 배운 적이 있는 辛彥이 그녀의 머리를 잘라주는 과정에서 그와의 관계가 남녀 간의 관계로 급진전하게 된다. [강조점은 인용자가 가함]


이 소설에서 작가의 의도는 주인공이 남성중심주의 사회 속에서 여성에게 들씌워진 허위적이고 왜곡된 관념과 억압적인 각종 요인들에 의해 희생되고 마는 인물임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12) 다만 작가의 의욕과는 달리 소설 자체로 볼 때는 그와 같은 주인공의 사고와 행동을 유발하는 제 요인들이 유기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자연스럽게 서술되지 못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주인공의 행동은 충분한 설득력을 갖지 못한 채 단순히 정욕의 발산 정도로 귀결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요약한 부분들에서 보듯이 이 소설의 여러 가지 에피소드 중에서 주인공 玉가 辛彥과 관계하게 되는 과정만큼은 비교적 작가의 의도가 짜임새 있게 관철되어 있다. 특히 선명하지는 않지만 여성에게 부가되는 가사노동이 그 가운데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전업주부든 취업주부든 간에 주부에게 가해지는 과중한 가사노동 전담, 취업주부의 가사노동 보조자로서 같은 여성인 친정어머니의 역할에서 보듯이 남성 노동자의 가사노동 면제를 전제로 형성된 노동시스템, 가사노동이 사적영역에 속하는 몰가치한 것으로 간주됨에 따른 여성의 자기 발전 기회 상실, 이런 제 요소들의 이면 작용에 의해 진행되는 주부의 여성으로서 자아 상실 및 모호한 형태의 자아 찾기 등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이 소설이 가사노동 전담자로서 여성이 감당해야 하는 억압을 제시하고 있는 점은, 비록 200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도리스 레씽의 〈19호실〉처럼 가사노동의 젠더화와 이로 인한 여성의 소외 문제를 깊이 있게 형상화한 작품은 아니지만,13) 여성으로서의 모호한 자아 각성과 자아 찾기가 올바른 출구를 찾지 못하고 결국 실패하고 마는 것을 동정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점과 더불어 향후 이 문제에 관한 홍콩소설의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3. 가정부 - 가사노동/돌봄노동의 대행자


가사노동과 관련한 남녀평등의 실현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 근본적으로는 노동으로서 가사노동의 가치를 인정함과 동시에 성별 분업 이데올로기를 타파함으로써 남녀의 구분 없이 가사노동의 참여를 당연한 일로 만드는 것이다. 물론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동시에 여러 가지 사항들이 구체적으로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현재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고 또 노력하고 있는 바와 같이, 자본주의적 사회 시스템 하에서 가치 평가의 척도가 되는 화폐 가치로의 환산이라는 방법을 포함하여 가사노동을 가시적 경제의 일부로 만드는 것이 포함될 것이다. Michael Hardt가 주장하는 정동적 노동(affective labor) 개념에서 보듯이 편안한 느낌, 행복, 만족, 흥분, 열정이나 심지어 결속감이나 귀속감 등을 생산하거나 다루는 노동인 가사노동 및 돌봄노동 자체가 가지고 있는 비물질적 노동으로서의 가치 부여 역시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다.14) 또 가사노동이 사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사적 노동이 아니라 그 자체로 공적 노동의 일부라는 것을 인지시키고, 그 점을 바탕으로 하여 가사노동에서 면제된 남성 노동자를 전제로 하여 만들어진 현재의 노동 시스템 및 사회 시스템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도 필요하다.

가사노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런 방안들은 비교적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탓에 현재 여성이 거의 전담하고 있는 가사노동을 일부라도 경감시키기 위해 가정기기의 활용, 소비재 상품의 사용, 가사노동의 사회적 대행 등의 방식이 임시방편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 중 가장 전통적이자 즉각적인 방법 중 하나는, 경제적 능력이 전제되는 데다가 그 대행자가 주로 같은 여성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상존하게 되는, 가정부나 유모 등 가사도우미의 고용이다. 예컨대 〈跳〉(綠騎士, 2000)에서 이미 프랑스에 살고 있는 주인공 李坡에 이어서 형과 여동생마저 이민을 결정함으로써 고령의 아버지 혼자 홍콩에 남게 되고, 아버지가 양로원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자 형제들이 의논하여 ‘鐘點女傭’(시간제 가정부)을 고용하기로 하는 것이 바로 그렇다.

홍콩의 경우 1970년대 중반 이후 비약적인 경제 발전으로 인해 사회적 경제 활동에서 대규모의 여성 노동력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가정에서 자녀 양육과 가사를 담당할 사람이 부족하게 되면서, 외국 국적의 여성 가정부를 초치하여 이 자리를 메우게 된다. 조리、빨래、아이돌보기 등 기본적인 가사를 담당하는 이들의 수는 꾸준히 증가하여 2005년 말에는 홍콩 인구 6,935,900 명의 3.2%에 달하는 223,200명에 이르게 된다.15) 이들 외인 가정부는 초기에 대부분 필리핀 출신이었던 데다가 지금도 필리핀 출신이 반수가 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菲傭’(필리핀 가정부)으로 통칭된다. 그러나 종래 홍콩소설에서는 주인공이든 아니면 보조적 인물이든 간에 홍콩인의 삶에서 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들을 다룬 적이 거의 없었다. 이 글을 위해 검토한 소설들도 마찬가지여서, 뒤에서 좀 더 상세하게 살펴 볼 〈我所知道的愛慾情事〉(王貽興, 2002) 단 한 편을 제외하고는, 그저 일과성의 단순 언급에 불과할 뿐 이들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홍콩소설에서는 왜 이들을 다루지 않았을까? 그녀들이 외국인 여성 노동자이므로, 홍콩 사람들이 심리적으로나 행동 상으로 그녀들을 홍콩사회의 구성원으로 간주하지 않거나 또는 의식적으로 애써 배제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외국인 여성 노동자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이들 외인 가정부는 이중의 차별을 받고 있다. 즉 외국인으로서의 차별뿐만 아니라 여성으로서의 차별까지 받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의 목적상 전자의 경우는 일단 논외로 하고 후자의 경우를 살펴보자. 아래 인용문은 전술한바 몇 되지 않는 단순 언급들을 모아본 것이다.


‘XX산장’이라는 이 아파트촌에는 산도 동물도 없었다. 그저 손목 굵기 정도의 나무 몇 그루에, 수많은 아파트 동과 수많은 버스와 수많은 외인 가정부가 있을 뿐이었다.

〈6座20樓E6880**(2)〉(陳麗娟, 2000), 112쪽.


1997 이후 […] 홍콩에 남은 외국 남성들은 매력도 없고, 돈도 많지 않으며, 입는 것도 신통찮다. 거리에서 보게 되는 외국 남자들은 모두가 지저분하고 제멋대로이다. 반바지를 꿰차고 세븐일레븐에서 맥주 몇 캔 사가지고는 늘상 외인 가정부와 노닥거리기나 한다.

〈愛美麗在屯門〉(也斯, 2002), 16쪽.


影影을 낳은 후 楚楚는 거의 1년 동안 잠을 이룰 수 없어서 외인 가정부를 들였다. 하지만 밤이 되면 影影은 여전히 楚楚와 함께 잤다. 외인 가정부가 잠을 탐하느라 아이를 배 곯리고 춥게 만들까봐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것이다.

〈無愛紀〉(黃碧雲, 2001), 152쪽.


이를 보면 홍콩소설의 작가와 독자를 포함하는 홍콩 사람들에게 이들이 어떤 이미지로 새겨져있는가를 금방 알 수 있다. 그녀들은 아파트나 버스와 동격의 사물이고, 수준 낮은 외국 남자들이 지분거리는 대상이며, 맡은 바 임무를 다하지 않는 불성실한 여성일 뿐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사물화되고, 남성의 성적 상상의 대상이 되고, 무능력하고 비생산적인 존재가 된다는 점에서, 여성 일반에게 가해지는 차별적 묘사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홍콩에서 가정부는 사실상 인구 비례에서 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 중 한 가지는 고용된 가정의 아이들을 돌보는 가운데 아이들의 어머니를 대리하거나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의 이성적 모델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我所知道的愛慾情事〉(王貽興, 2002)에는, 화자의 성장기에 사회활동으로 바쁜 부모가 로사라는 가정부를 고용하는데, 우선 그녀와 관련된 몇 부분을 보도록 하자.


매일 학교가 끝나면 나는 어김없이 집에 돌아와 가정부가 차려준 점심을 먹고, 그녀의 감독과 보살핌 속에서 숙제와 복습을 하고 티비를 봤다. […] 대략 4,5학년 때 내 하체에서는 음모가 나기 시작했다. […] 이 변화는 로사에 대한 나의 인식에 영향을 주었다. 나는 그녀를 나의 일상생활을 보살펴주는 가정부의 신분에서 청소년기 남자아이의 여체에 대한 환상과 갈구의 투영으로 바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 로사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여전히 매일 아침 나를 깨워 내 손을 잡고 집을 나서서 […] 학교버스를 기다렸고, 하학할 때면 학교 버스에서 나를 마중했고, […] 시험을 잘못 쳐서 부모에게 욕을 먹거나 매를 맞으면 몰래 내 방에 들어와 나를 위로해주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가까웠다. 그녀는 나의 것이었고, 나는 그녀의 것이었다. (110-111쪽)


여기서 보다 시피 가사노동의 대행자로서 가정부는 단순히 조리와 세탁만 대행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부분 고용주 가정의 자녀 교육까지 떠맡음으로써 아이와 유사 모자지간의 관계를 형성하는가 하면, 청소년기 아이에게는 이성적 대상이 되기까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정부는 가족 내에서 위치가 모호한데다가(비록 가족처럼 대해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적으로 대해준다는 것이지 가족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아니다), 전통적으로 주부가 하는 일을 거의 대부분 대신하기 때문에, 그 집안의 주부(아내이자 어머니)와 긴장 관계에 있기가 쉽다.16) 이에 따라 고용된 집의 식구들로부터, 특히 같은 여성인 주부로부터 지배/피지배의 관계에 처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홍콩소설에서는 외인 가정부든 아니든 간에 가정부가 등장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적절한 예를 찾기는 쉽지 않지만, 같은 소설에 나오는 다음 인용문은 이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흔치 않게 가족 세 사람이 같이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을 때, 나는 로사가 서랍 속에서 기천 달러를 훔쳤다고 핑계대면서 엄마에게 그녀를 내보내라고 말했다. […] 아버지는 […] 아무 말 없었지만 반대하지 않았다. […] 그날 밤 엄마는 어떻게 로사를 달래야할지 몰라서 그저 나지막한 소리로 그녀의 이름만 불러댔다. 로사, 로사, 로사. (121쪽)


가정부를 가족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것과 더불어 가정부의 표면적인 해고 권한은 주부가 가지고 있다는 것, 그러나 남편의 묵시적 동의와 아들의 말 한 마디에 그날 곧바로 수년 동안 고용했던 가정부를 해고한다는 것, 이는 남성의 지배하에 있는 여성이 같은 여성과 다시 지배/피지배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이 소설에서 가정부를 해고하는 실제 이유가 고용된 가정의 남자들인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동시에 성폭행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다시 한 번 소설을 보자.


어느 날 […] 일찍 집에 오게 되었다. […] 문을 열자 아버지가 벌거벗은 로사의 몸을 타고앉아 있었다. […] 나는 간신히 침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 나는 토하고 싶었다. 나는 아버지가 증오스러웠다. 그런데도 나는 자위를 했다. […] 나는 조금 전 로사의 납작한 유방, 두 다리를 벌린 각도, 다리에서 건들거리던 팬티, 용서해달라는 소리를 상상했다. […] 저녁에 로사가 노크를 하며 밥 먹으라고 불렀다. 그러면서 나더러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 애원했다. […] 로사는 나와 티비 사이에 꿇어앉아서 울면서 머리를 들고는, 조금 전처럼 불분명한 구앙뚱말로 뭐라고 했다. […] 나중 그녀는 나의 몸에 올라타더니 옷을 벗겼다. 막 자위를 했던 나는 처음으로 고통과 마비 상태에서 그녀와 했다. 그것은 나의 첫 번째 여자 경험이었다. (120쪽)


여기서 보다시피 가정부는, 고용된 가정의 남자들로부터 성적 대상이 되고 심지어는 성폭행까지 당하는 것이다. 그리고 해직을 두려워한 로사가 입막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화자의 은밀한 욕망까지 채워주지만 그 결과는 남자들의 암묵적 공모와 요구에 의한 주부의 일방적인 해고 통보였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이 소설이 어느 정도 가정부의 상황을 보여줌으로써 결과적으로 피해자로서의 그들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한편으로는 여전히 그들을 물화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홍콩의 언론 매체와 마찬가지로 그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궁극적으로는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있다는 점이다.17) 이 소설에서 묘사된 바를 종합해 보면 그녀의 모습은 전혀 성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에 눈을 떠가는 성장기 아이의 시각을 빌어서 상당히 유혹적이라는 느낌을 주고 있다. 또 성폭행이었을 아버지와의 성관계가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생략하면서, 한편으로는 입막음을 위해 어린 소년의 욕구를 채워주는 등 암암리에 그녀를 성적으로 방종한 여성인 것처럼 그리고 있다. 게다가 그녀는 독학으로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정도로 지적 능력과 성실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력을 속이고 푼돈을 떼먹으며 농땡이를 치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덧씌워진다.

이와 반면에 화자는 성장기에 있었던 자신의 잘못을 참회한다는 방식으로 이 일을 서사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할아버지는 부인이 셋이었다. 들은 바로는 풍류를 즐기는 천성이라 놀았던 여자의 수가 이 정도가 아니라고 한다. […] 둘째 할머니 소생인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진수를 다 물려받은 듯하다. […] 당시 나의 순수하면서도 비열한 욕망이 사실 아버지가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에서 나온 것임을 생각지도 못했다.[…] 그랬더라면 나중 일어난 일로 해서 그렇게 충격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는 권력에 근거한 성적 충동과 행동이 마치 생래적인 유전인 것처럼 묘사함으로써, 자신을 포함해서 아버지와 심지어는 할아버지까지 면죄부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면죄부가 있기 때문에, 화자는 정작 피해자인 가정부가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가라든가 그 피해가 어떠한가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함 없이, 그저 일방적으로 가정부를 성장기 기억의 대상으로만 취급할 수 있는 것이다.

전술한 것처럼 검토 대상으로 삼은 홍콩소설에서 가정부에 관련된 부분이 워낙 제한적이었다. 이에 따라 가정부의 모습이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해 다양한 측면에서 검토해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이상에서 살펴본 것만으로도 홍콩소설에 나타난 가정부의 모습에도 여성에 대한 기존의 편견과 물화가 그대로 적용되고 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런 점은 작가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모두 마찬가지이다. 특히 〈我所知道的愛慾情事〉(王貽興, 2002)에서 나타난 주부와 가정부의 관계는, 홍콩이 영국이라는 식민통치자에서 벗어나서 중국이라는 새로운 식민통치자의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냐는 회의가 있는 한편에서는 홍콩이 오히려 홍콩 주변부의 深圳 등지를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식민지화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냐는 반론이 제기되었던 것을 연상시킨다. 혹은 미국에서 한인(또는 아시안)과 흑인들 사이의 갈등이, 실은 유럽출신 백인이 지배하고 나머지 집단을 하위에 배치하는 전략적 작업에 의해 형성된, 백인을 정점으로 하는 미국식 인종질서를 반영이라는 것을 떠올리게 만든다.18) 다시 말해서, 여성 내부에서 다시 또 지배/피지배의 관계가 형성되고, 가부장제 사회 하에서의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피지배를 모방함과 동시에 그것을 강화시켜주는 기능을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드는 것이다.



4. 맺음말


〈從一扇牆到一堵門〉(石逸寧, 2003)에 보면, 어린 소녀가 부엌에서 음식 준비를 하고 있는 어머니 대신 화자를 맞이하고, 화자는 그녀의 행동을 보며 아직 손님 대하는 법을 모르는구나하고 생각한다. 〈當勞的官司和我的拳頭〉(顔純鈎, 2003)에도 화자가 방문한 집의 어린 딸이 어머니가 깍은 과일을 대신 내오고, 화자는 그녀의 가녀린 모습을 보며 그 어떤 남자라도 그녀가 건강하게 잘 자라서 한 평생 잘 살기를 바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혹시라도 이는 성별 분업 이데올로기의 전승을 의미하면서 앞으로도 가사노동이 여성의 일이 될 것임을 상징하는 불길한 장면은 아닐까?

만일 이 장면들을 정말 그렇게 해석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지나친 억측일 것이다. 물론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현실적으로 홍콩에서는 가정 내 양성평등에 개선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주부들이 가사노동을 전담하고 있으며, 홍콩소설 속에서도 이를 당연시하여 가사노동 전담자로서의 여성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재생산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주부란 비이성적、비합리적、비생산적이자 가사노동이나 하면서 남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 현실과 소설 양쪽 모두에서 가사노동의 사회적 대행자라고 할 수 있는 가정부에 대해서도 여성을 사물화하는 편견이 그대로 작동되고 있으며, 심지어는 같은 성별인 주부와 가정부 사이에도 지배/피지배의 관계가 형성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 소설의 장면들을 결코 그렇게 해석할 수 없는 것은, 소설 자체로 볼 때 딸 밖에 없는 가정에서 일어난 일과성의 단순한 장면일 뿐이기도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가사노동과 관련한 현실 세계의 현재 상황이 더 이상 그대로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가사노동 문제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삶의 모든 방면에서 양성평등에 입각한 더욱 진전된 견해와 구체적인 방안이 속속 제시되고 있으며, 아직 전면적인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 실천 역시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홍콩소설에서도 비록 아직 개념적이고 모호한 상태이기는 하나마 가사노동의 젠더화와 이로 인한 여성의 소외를 다룬 〈我所知道的愛慾情事〉(王貽興, 2002)와 같은 소설이 출현한 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그러한 변화가 어느 수준에서 얼마나 빨리 이루어질 수 있는가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사상이나 이데올로기 역시 사회적 시스템의 일부이다. 하지만 양자의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후자의 변화가 전자의 변화를 요구하면서 또한 전자가 후자의 변화를 이끌어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정치나 학술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인간 삶의 변화에 기여하는 문학 역시 이 부분에서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홍콩소설은 양성평등 문제에 있어서 주로 여성이 전담하고 있는 가사노동 및 돌봄노동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아직 충분히 주목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홍콩소설이 향후 이 문제에 관해 그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아직은 미흡한 홍콩소설의 현 상태를 일종의 참고로 삼음과 동시에 앞으로 기대되는 새로운 변화를 계속 주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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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ril Moi, Sexual/Textual Politics : Feminist Literary Theory, (London ; New York: Methuen, 1985)



 


1) 앞으로 돌봄노동은 특별히 따로 언급하는 경우 외에는 가사노동에 포함시켜 말하겠다.


2) 토릴 모이에 따르면, 1970년대 초반 미국에서 성행한 ‘여성 이미지 비평’은 남성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상투적으로 등장하는 여성 이미지를 연구하는 비평으로, 작품 속 여성의 이미지가 실제의 여성과 얼마나 부합하는가를 기준으로 작품을 평가하면서도, 이와는 모순적으로 현실에서는 찾기 어려운 자기실현적 여성이라는 역할 모델의 제시를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Toril Moi, Sexual/Textual Politics : Feminist Literary Theory, (London ; New York: Methuen, 1985), 32쪽과 42-49쪽 참고.


3) 이상에 대한 자세한 서지는 참고문헌 부분을 보기 바란다. 이 글에서 별도 표기가 없는 인용문은 《香港短篇小說選》(香港三聯書店)에서 인용한 것으로, 괄호 속 쪽수는 당해 연도 작품집의 쪽수이다.


4) 통계청 홈페이지 http://www.nso.go.kr/ 자료 〈2004 생활시간조사 결과〉(2005.5), 38-40쪽.


5) 통계청 홈페이지 http://www.nso.go.kr/ 자료 〈2008년 사회조사 결과〉(2008.11), 23쪽. 부인이 주도한다고 응답한 사례는 남편 89.4%, 부인 89.5%에 달했고, 남편이 주도한다고 응답한 사례는 남편 1.9%, 부인 1.5%였다고 한다.


6) 陳膺強 劉玉瓊 馬麗莊, 〈香港在婚婦女職業模式與家庭決策〉, 伊慶春 陳玉華 主編, 《華人婦女家庭地位: 台灣, 天津, 上海, 香港之比較》 (北京: 社會科學文獻出版社, 2006), 246-268쪽.


7) 김성희, 《한국여성의 가사노동과 경제활동의 역사》 (서울: 학지사, 2002), 13-37쪽에서 일부 참고.


8) 루쓰 코완 지음, 김성희 등 공역, 《과학기술과 가사노동 - 일이 더 많아진 주부》 (서울: 학지사, 1997)


9) 전자의 경우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전체 과정을 보면 평상시에는 부인이 이 일을 전담하고 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후자의 경우 원래 게를 파는 가게에서 일하던 화자의 아버지는 퇴근 때마다 팔다 남은 죽은 게를 가져와서 이미 저녁을 먹은 후인 아들들이 질릴 정도로 해먹이고, 나중 성인이 된 화자는 언젠가 아버지를 생각하며 일회성으로 자신의 아이들에게 게요리를 만들어 먹인다.


10) 이에 관한 좀 더 상세한 설명은 김혜준, 〈1997년 후 홍콩소설에 나타난 여성의 모습 - 어머니, 딸, 부인을 중심으로〉, 《중국어문논총》 39, 서울: 중국어문연구회, 2008.12, 603-635쪽을 참고하기 바란다.


11) 부인을 성적 서비스 제공자로 보는 점에 관해서는 김혜준, 〈1997년 후 홍콩소설에 나타난 여성의 모습 - 어머니, 딸, 부인을 중심으로〉를 참고하기 바란다.


12) 작가는 소설의 말미에서 화자의 신분으로 직접 등장하여 주인공에 대해서 자신의 설명을 덧붙인다. 그 설명을 해석해보면, 그녀는 여성으로서의 존재는 무시하고 오로지 가정의 유지만 강조하는 허위적인 도덕관념과 여성의 진정한 자아 찾기와는 무관하게 사실상 본능적인 욕구에 불과한 왜곡된 사랑 관념에 의해 희생된 인물이라는 것이다. 좀 더 상세한 것은 김혜준, 〈1997년 후 홍콩소설에 나타난 여성의 모습 - 어머니, 딸, 부인을 중심으로〉를 참고하기 바란다.


13) 전문직 여성이었던 주인공 수잔은 남편과 사전 계획 하에 결혼 후 가사노동/돌봄노동을 전담하다가 아이들이 성장한 후 원래의 독립적인 여성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그러한 현실을 탈출하기 위해 자신 만의 공간을 찾아 집에서 호텔로, 호텔에서 다시 다른 호텔 19호실로 옮기지만 결국 더 이상의 탈출구가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유제분, 〈돌봄/가사노동의 소외와 여성공간〉, 《영어영문학》 54, 서울: 한국영어영문학회, 2008.6, 169-188쪽 참고.


14) 마이클 하트, 〈정동적 노동〉, 질 들뢰즈 외 지음, 서창현 외 옮김, 《비물질노동과 다중》 (서울: 갈무리, 2005), 139-157쪽 참고. 미래학자인 Alvin Toffler 역시 비화폐 경제로서 ‘소비자생산 경제(prosumer economy)’의 개념을 제시하면서 무보수 가사노동을 그 중 한 가지 중요한 예로 들고 있다. 그의 언급은 여성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가사노동의 가치가 다방면에서 이미 널리 인정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앨빈 토플러 하이디 토플러 지음, 김중웅 옮김, 《부의 미래》 (서울: 청림출판, 2006), 248-253쪽 참고.


15) 公務員事務局法定語文事務部, 《香港 2005》 (香港: 公務員事務局法定語文事務部, 2005), 121쪽. 홍콩의 외국인 가정부의 사회적 상황과 지위 및 이미지에 관해서는 윤형숙, 〈지구화, 이주여성, 가족재생산과 홍콩인의 정체성〉, 《중국현대문학》 33, 서울: 중국현대문학학회, 2005.6, 129-156쪽을 참조하기 바란다.


16) 윤형숙, 〈지구화, 이주여성, 가족재생산과 홍콩인의 정체성〉 참고.


17) 홍콩에는 외인 가정부는 잘 감독하지 않으면 가정부 고용계약과 이민법을 어기고 매춘업에 종사하며 주인집 남자를 유혹하는 부도덕한 사람들이라는 대중적인 이미지가 퍼져 있다. 윤형숙, 〈지구화, 이주여성, 가족재생산과 홍콩인의 정체성〉 참고.


18) 이정덕, 〈미국의 인종 · 민족정체성과 일상정치 - 뉴욕시 할렘을 중심으로〉, 김광억 외, 《종족과 민족 - 그 단일과 보편의 신화를 넘어서》 (서울: 아카넷, 2005), 379-428 쪽 참고.


 

김혜준, 〈1997년 후 홍콩소설에 나타난 주부와 가정부의 모습 ― 가사노동 / 돌봄노동과 여성 문제를 중심으로〉, 《중국학》 제33집, 부산: 대한중국학회, 2009년 8월, pp.355-378.